설교문


20130908 종북 게이

관리자
2026-09-13
조회수 188

사실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교회들이 어린이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많이들 잘 모르시죠? 어린이들과 서로 눈높이를 맞추고 마음을 맞추어 가는 과정은 하느님 앞에 마음과 몸을 가져오는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욥기의 말씀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38장 16절에서 18절 말씀인데요.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일이 있느냐?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일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 번 들어 보자.


누가복음 5장 8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성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사실 굉장히 많이 있고요. 그 이야기들은 특히 기독교 국가로서 좀 자리매김을 오래 했던 그런 나라들의 문화 속에는 또 곳곳이 말로나 여러 관습으로나 남아 있는 경우들이 많은데요. 성서 이야기 중에 이 이야기도 단어로 남아 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사사기에 나와 있는 말이 그 이야기인데요. 이런 이야기죠.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희도 보통 이 사람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 혹은 어느 계급 되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위해서 무언가 수수께끼나 '요걸 해봐라, 알면 요렇고 모르면 저렇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듯이 사사기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단어를 말해 보라고 하면서 그 단어가 그대로 들리는 그 발음을 하면 오케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라는 얘기죠.


사사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의 단어는 쉬볼렛이라는 그런 단어고, '너 그 얘기를 해 봐', 해서 쉬라는 발음이 안 나오고 시라고 해서 새어나오는 발음이 나오면 죽였다라는 이야기고, 물론 그렇게 해서 죽인 사람의 숫자가 성서의 기록은 한 4만 2천 명 이렇게 나와 있지만 사실은 그 숫자는 굉장히 불려진 숫자이고 당시 인구와 이런 것들을 보면 그만큼 그만큼 많이 죽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거는 그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단강을 두고 싸움들이 붙고 그 에브라임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 것이고, 에브라임 사람이냐 이 사람이 길르앗 사람이냐 이런 것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쓰여진 단어라는 거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나서 그 말은 결국은 영어에도 비슷한 발음이 나는 시볼레라고 하는 단어로 나눠져 있어서, 그 단어의 뜻인즉슨 특정한 계급이나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리고 특수한 말씨 발음 이런 것들을 구분해내는 말이라는 것 자체로 그 단어가 남아 있고 시험해 보는 말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 시험해 보는 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기도 하는 게 아 요즘이지요. 겉으로 보여서 구분할 수 있는 정도로라면은 대부분의 사람이 안심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제 많은 경우가 여전히 구분할 수 없게 되는 데 있어서의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쉽게 얘기하는 것이 많은 경우에 이 연령대별로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 쟤는 왜 이렇게 남잔지 여잔지도 구분을 못 하게 입고 다녀'라고 얘기하면서 꼭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죠. '넌 남자냐 여자냐.' 남자라고 대답하면은 '좀 남자답게 하고 다녀', 그리고 여자라고 대답하면 '여자가 남자같이 입고 다녀', 이런 얘기 굉장히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보통 하늘 뜻 펴기를 할 때 주로 붙이는 제목은 성서 구절에 나오는 것들을 주로 많이 인용을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조금 자극적일 수도 있는 종북 게이라는 그런 제목을 좀 붙여봤습니다. 그 이유는요, 창조절을 맞이해서 저희가 둘째 주일을 맞고 있는데, 사실 저희가 6월 달에 이미 생태 공동체 주일이라는 거를 지나면서 우리와 어떤 뭇 생명과의 관계들을 조망해 보고 성찰해 보는 그런 기회들을 가졌는데, 창조절이 시작되면서 창조주를 기억한다라는 것은 동시에 창조주로 말미암아 창조 세계의 어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청지기라고 불리움을 받았다고 우리가 얘기하고 주장하는 바로 사람들에 대한 것들을 조금 더 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여러 우리가 셀 수 없는 종들이 이 세상 가운데 있는데,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이 종이 행하는 사실 뭐 선한 일도 많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굉장한 창조 세계를 깨뜨리고 범하고 하는 엄청난 범죄들을 사실 이 인간이라는 종이 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죠. 그것 가운데서도 서로가 서로를 어떤 빌미를 가지고 죽이려 덤볐느냐라는 것들도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봐야 할 텐데요.


요즘 아시다시피 요즘 우리 사회에 있어서, 현재 우리에게 있어서 종북과 이 게이란 말은 굉장한 상징성을 저는 갖고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먼저 종북 먼저 얘기를 해본다면, 우리가 요 한 열흘 어간의 엄청난 일들을 우리가 보았고 그것이 뭐라 그럴까요? 뭐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고 여러 논쟁들도 사실 있고, 그것이 굳이 다른 뭐 그야말로 극우 쪽에서 주장하는 것 외에도 어쨌든 건강한 어떤 시민사회와 여러 고민들과 운동과 진보 뭐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굉장히 다양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근데 그러면 어쨌든 종북이라고 얘기하는 그 종북이 뭐냐라고 얘기했을 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도 규정지을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이 있을 것 같은데, 여튼 그들이 주장하는 종북이 뭐냐라고 했을 경우 조갑제 칼럼에 한번 이런 이야기가 실렸던 것 같아요. 국가보안법이 자기 생활에 있어서 뭔가 불편을 초래하는 그런 일이 있다라면 그 사람은 무조건 다 종북이라는 거죠. 불편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국가보안법도 사실은 우리가 전혀 불편하게 살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서 여튼 그 종북을 그 감별할 수 있는 법들이 있다라는 거죠.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 사람이 종북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조갑제는 이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대기업 대통령 미국을 비판하면서 북의 세습을 비판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북을 비판할 때도 북한은 가난하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세습 지도자, 사회주의 체제, 주체사상, 인권 탄압은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게 다 종북이라는 거죠. 그리고 종북 중 최고 악질은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자들. 우리 다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데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적군 홍군 이런 말을 많이 쓴다라는 거죠. 그래서 빨갱이다라는 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 민주, 평화, 개혁, 통일, 진보, 평등, 민족, 해방, 자주, 이런 말은 맨날 좋은 말 쓰는데 그중에서 쓰지 않는 말 하나가 있는데 그게 종북이라 그래요. 무슨 말일까요? 되게 웃겨요. 자유, 자유라고. 자유란 말을 쓰지 않는다라는 거죠. 그리고 자기 말을 순간적으로 뒤집고 약속을 어긴다. 그리고 이런 행위에 대해서 수치감이나 가책이 없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 모두 종북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종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떤 종북이라고 말해지는 실체라는 것은 아무리 뭐 주체사상을 어쩌고저쩌고 얘기한다 그래도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다 종북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얼마든지 잡아갈 수 있고 그다음에 그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구실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서 근래에, 올해 들어서 차별금지법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실 등장한 이 신조어가 종북 게이라는 말이거든요. 종북 게이가 뭐냐 뭐 이런 얘기들을 한창 할 때 저는 언젠가 그런 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북 게이라는 말 자체가 이 사회에 있어서 이 사회가 누구의 손에 의해서 누구의 권력에 의해서 좌지우지될지를 이렇게 예측하게 하는 말이다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슬프게도 그 말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종북이라고 함부로 재단하는 사람들의 정치적인 극우파든, 그리고 게이라면 정말 이 사회에서 반드시 없애고 넘어가야 될 사회적인 악의 무리들로 보고 있는 종교적인 극우주의자들이 함께 지금 합세해서 모든 여론들과 지금 정치의 과정들에 이제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이죠.


그 종북 감별법이 나왔었으니까 그럼 게이 감별법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들이 사악하냐라고 생각을 해보냐면, 어쨌든 나와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하면 알아낼까에 대해서 굉장히 골몰을 하고 있다라는 걸 너무 알 수 있는데요. 이것도 굉장히 좀 황당합니다. 예를 들면 게이 중에는 쩍벌남이 없다, 항상 다리를 꼬고 앉는다, 눈웃음을 잘 치고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이런 이야기들부터 시작해서. 그 어느 뉴욕 신문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그래요. 가마 있잖아요. 가마 어디에 가마가 있는지, 그 머릿결이 시계 반대 방향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왼손 엄지 지문 주름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촘촘하고 그리고 검지가 약지보다 길면 게이다. 이런 것이 어떤 과학적인 이 검증 결과를 뒷받침하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거죠. 결국은 이 역시도 굉장히, 모든 사람이 열 사람이면 다 그 감별법에 해당하느냐,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적인 규범의 체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이제 뭐 그 국정원 해체나 이 개혁에 대한 촛불을 드셨던 분들이나, 또 혹은 뭐 광통교에서 있었던 그 공개 결혼식으로서는 최초의 김조광수 감독과 김승환 씨 결혼식에 가셨던 분들이나 모든 걸 다 보셨을 텐데요. 거기도 어김없이 종교적인 근본주의자들이 등장을 해서 굳이 여기서 말할 인분을 뿌리는 그런 만행의 사건들도 사실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는 역시 성서도 등장했고 신의 이름이 하느님이라는 이름도 등장을 했었던 그런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인데 너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싫어하고 이 조금 더 커져서 미움, 그리고 미움이 더 커져서 혐오의 모든 극단적인 폭력의 행동들로 나타나는 것들을 우리가 굉장히 많이 본다라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어디 저기 살고 있는 밀림 속의 사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있는 같은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러한 행동들과 말과 모든 사고들을 한다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과정에 대해서 잘 적어놓았죠. 누구의 형상대로냐면 바로 하느님의 형상대로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실은 흙보다도 더 미세한 먼지라고 보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 상으로는 더 맞는데요. 이러한 약간 촉촉이 젖은 그런 미세 먼지를 가지고 빚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었다라는 것이 사람을 만드는 창조 설화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아담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뭐라 할까요? 남성을 뜻한다라기보다는 사실 사람을 뜻하는 말인 것인데요. 여튼 사람을 창조를 하셨다라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과 사람이 그냥 혼자서 외로이 살지 못하는 존재다,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이 명확하게 쓰여져 있는 것이 창조 설화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현재 모든 문제들까지도 연장선 속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좀 그렇지 않다라고 얘기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있어서도 얼마나 성서를 근거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여러분들 아실 것입니다.


다시 보면 볼수록 굉장히 이렇게 분노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적으로 일 대에 굉장히 중요한 신학자 사상가라고 얘기할 수 있는 어거스틴이 됐든 루터가 됐든 또 그다음에 뭐 칼빈이 됐든, 그리고 근래에 많은 장로교회에 영향을 준다는 신학자 바르트의 이야기들도 그렇고, 굉장한 혐오성 발언들이 있어 왔고 그런 발언들이 현재 많은 신앙인들의 이렇게 그, '아 이건 바르트의 말이래', '뭐 누구의 루터의 말이래', 굳이 이렇지 않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정통과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몇 가지 또 좀 들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여자가 그녀의 특성 속에서 단독적인 배우자로서 별도로 언급될 때는 그녀는 하느님의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단독적으로 언급될 때도 여자와 하나가 되어 결합되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느님의 형상이다.' 누구의 얘기이냐면 어거스틴 얘기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또 이런 이야기도 있죠. '그는 가정과 국가를 통치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소유물을 방어하고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식량을 재배하는 등등의 일을 한다. 반면에 여자는 벽에 박혀 있는 하나의 못과 같다. 아내는 바깥일이나 혹은 국가 일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사람으로서 집에서 가정 일을 돌본다.' 누구의 얘기일까요? 루터의 얘기입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은 창조 때부터 확립된 질서에 속한다. 하느님의 거룩한 약속이 여기에 담겨 있으니까 남성이나 여성 모두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거 역시도 바르트의 얘기입니다. 이 한마디로 '저 사람은 정말 나쁜 놈이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한다기보다, 여튼 그런 사고들이 얼마나 우리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 생각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자, 현재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관심 갖고 무언가를 해나가야 할 때 소중한 가치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생각을 더 많이 해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오류 역시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오류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굉장히 우습게 생각하고 '아 저거는 누가 저 사람 말에 무슨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겠어'라고 생각하는 말들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라고 믿고 있다는 그 현실을 좀 더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건 뭐 많은 교회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단편에서도 그런 것들은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랬을 때 고민이죠. 쫓아다니면서 '그게 아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고, 때로는 그러기도 하죠. 그러나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완전히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동시에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을 보게 되기도 하죠.


그런데요, 어쨌든 우리가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것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더 많은 사람들을 진짜 그 발음 하나로 4만 2천을 죽이는 것과도 더한 일들이 있다라는 것이고, 역사는 반복되기에 반복되어 온 역사에도 그 유사한 사건들이 많이 있다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곧 그런 일들 역시 반복될 수 있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나치가 그랬고 매카시즘도 그랬고, 저는 여전히 이 사회가 가는 방향이 그 당시와 그닥 별반 다를 바 없다라는 것에 더 많이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아까 얘기했습니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라고. 그리고 역사는 반복이 된다. 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런 말 막스가 한 얘기 여러분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하다 보니까, 왜 우리 속담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그래서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저렇게 왜 뒷북을 쳐 할 때 그런 속담을 쓰는데, 이외수 선생님이 그걸 틀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를 제가 뭔가 아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 비웃지 말아라. 그는 지금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에게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모로. 그 반성의 시점은 바로 우리가 오늘 욥기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물으셨던, '니가 알면 얼마나 알아서 니가 정말 알면 얘기해 봐라'라고 얘기했던 그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얘기한 우스운 우스운 감별법들, 우리 사고 안에 다른 모양 다른 버전으로 굉장히 많이 축적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단정 짓는 것, 반성해야 하겠죠.


역시나 또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에서 읽어준, 우리가 읽은 굉장히 익숙한 내용이었죠. 여기에 던져서 한창 수고하고 있는데 예수가 딱 와서 저기에 던지라고 하니까 굉장히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라는 얘기죠. 뭐 그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돼서 막 전도와 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그것 가운데서 우리가 으레껏 알고 있는 그리고 요만큼 알고 있으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런 어리석음에 대해서 바로 이 복음서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라고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느 사람이나 뭐 존귀하고 소중하다라는 건 어린이 하늘 뜻 펴기에서도 우리가 다시 한번 재확인을 했죠. 당장 우리한테 낯설고 불편한 것들, 위험해 보이는 것, 그리고 굉장히 하찮아 보이고 정말 이렇게 '같이 뭐 우리가 굳이 그렇게 같이 있어야 될 필요가 있겠어'라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일수록 이 창조 절기에 더 많이 생각하시고 떠올리시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라는 지식조차도 굉장히 하찮다라는 것이 성서에 쭉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우리는 그것대로 잘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변하려고 몸을 써도 우리가 변하지 않는 존재의 한계를 우리가 되려 고백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내려놓을지를 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들 주변에서 자꾸자꾸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을 자꾸 듣게 될 경우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 얘기가 왜 자꾸 들릴까, 왜 내 귀에 자꾸 거슬릴까.' 그것은 사실 내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듣기 싫은 이야기일런지 모르지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공동체면 공동체, 서로 인간관계면 인간관계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져 있다라는 느낌을 그 사람은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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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 이야기의 관계에 있어서 내 본위가 아니라, 적어도 적어도 우리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그런 가슴, 가슴이 되기를 바라고, 아 이 종북과 게이에 관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 사회의 그리고 닥칠 그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우리가 지혜로 깨우쳐서 그에 대해서 우리조차도 그 안에서 휘말리지 않기를, 도리어 우리 안에서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침묵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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