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31013 사마리아 예언자와 한 사마리아 사람

관리자
2026-09-25
조회수 34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 말씀, 다시 한 번 열왕기하 5장 말씀, 그리고 누가복음 17장 말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말씀 먼저 읽겠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할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바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의 강물에선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17장 15절에서부터 19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하느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멘.


열왕기하 5장의 말씀은 어린이 하늘뜻펴기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구구절절 다 잘 전해 주셨는데요. OO 님하고, 그러니까 보통 어린이 하늘뜻펴기 준비하신 분하고 저하고 같이 있을 때 서로 뭐를 의논하거나 뭐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연히 오늘도 OO 님하고 저하고 이 하늘뜻펴기를 서로 어떻게 준비하는지에 대해서 나누지 않았죠.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깜짝 놀라시는 이유는 아마 저와 더불어서 또다시 되새김질을 하면서 아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사실 그림으로 몇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했는데요. 좀 다른 그림인 것 같아요. OO 님은 리얼한 얼굴과 등장인물들을 내세웠는데, 쭉 이제 요거는 전체적인 그림 이야기들 중에서 중요한 키포인트였었던 것 같은데요. 두 번째 그림을 보시면 조금 더 여러분들한테, 뭐 성화에 해당합니다만, 상황을 아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어느 사람이 이 나아만인지는 보기에도 복장으로 도드라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우리 OO이가 7번을 겨우 채웠던 그 강물도, 그다음 그림을 보시면, 예, 아마 그 지금 요단강이라고 아까 쓰셨던 그거는 그 옛날 3천 년 전에 요단강은 아니었었던 것 같고요. 여튼 이런 상황에서 데리고 온 부하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에 자기의 몸을 벗어서, 몸을 벗고, 어떻게 보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참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반복했었던 그런 그림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의 제목을 사마리아의 예언자와 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붙였습니다만, 뭐 앞에 있는 사마리아 예언자는 아시다시피 엘리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조금 더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과 또 성서에 감춰져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본다면, 사마리아의 예언자가 있는데 그분한테 가면 나을 수 있을 텐데요라고 말했던, 전쟁 중에 끌려와서 일종의 전리품처럼 끌려와야 했었던 어린 소녀 역시도, 아주 작은 목소리를 가진, 그리고 굉장히 보잘것없다고 사람들에게 여김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또 하나의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훌훌 벗어 던져야 했었던 이 나아만이 갖고 있었던 것들은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이 여전히 추구하고 욕망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같이 의미한다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에게 직접 얘기할 수 없었던 그 어린 소녀는 자기의 여주인에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 그리고 다시 왕에게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시리아 왕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왕과 왕의 이런, 뭐라 그럴까요, 굉장히 윗선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다시 밑으로 내려오는 그런 구조를 가지면서 이야기들이 진행이 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어, 나아만이 쌓아 왔었던 명성이라는 것은 사실은 전쟁인 것이죠. 상대를 죽이고 패하게 하고 빼앗아 오고, 상당히 그런 것들을, 남성적인 굉장한 사회적인 구조 악 속에서 쌓아 올린 명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물어뜨려 가는 그런 과정 가운데서는, 아까 어린, 그리고 작은, 또 하나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로부터,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아까도 왜 내가 자꾸 들어가야 되고 왜 이 물보다 더 좋은 양질의 물이 있는데 내가 왜 여길 들어가야 하고 하는, 이거는 사실 뭐 교만하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저는 그냥 상식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더 좋은 물들, 그리고 굳이 왜 여기.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그리고 사실은 모든 걸 가졌지만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굉장한 약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깨부수는 것은 자기가 그냥 지극히 갖고 있는 상식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어떤 지도입니다. 보시면 사마리아가 어디쯤 있는지 보이실 테고요. 북과 남을 오가는 데 있어서 늘 사마리아가 가운데에 걸려 있다라는 것도 여러분들 보실 수 있고, 그리고 사실 이곳은 늘, 특히나 예수 시대에 있어서는 더더군다나 굉장히 천대받고 차별받는, 그래서 여기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것조차도, 그러고 나서는 상당히 정결례들을 많이 행해야 했었던, 그래서 사람들이 직접 통과하기보다는 돌아서 가기를 애썼던, 돌아서 가기 위해서 애썼던 지역이 또 사마리아라는 것,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바로 이러한 그 사마리아, 특히나 이 제국 시대에서 이주민들을 놓고, 그리고 그 안에서 흔히 말하는 순수 혈통을 가진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살 수밖에 없었던 바로 이곳의 이야기가 구약과 그리고 오늘 또 신약에서의 본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요. 바로 그 사마리아를 예수가 왜 갔냐라고 얘기했을 때 누가에서 뭐라고 얘기가 되어 있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사마리아를 예수는 돌아가서, 돌아가지 않고 관통해서 갔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부터도 여러 가지 사마리아와 관련된 예수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비껴가지 않고 돌아가 들어가면서, 바로 그 들어가는 그곳 가운데서 또 다른, 지역적으로 굉장히 배척받는 곳이 사마리아였다면, 이제는 예수가 또다시 맞닥뜨리는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무리,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을 주르르르 만나는 그런 사건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17장의 이야기인 것이죠.


보면 우리는 뭐 이 본문을 보면서 감사해야 되는 사람이 된다라고 얘기합니다만, 전 이야기 속에서도 10명 중에 9명이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보시면 왜 그분들이 쭈르르 가냐 하면, 예수께서 분명히 제사장한테 가라라고 얘기를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모든 것 가운데서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예수가 한마디 툭 던지는 거예요. 제사장한테 가서, 그렇죠? 너희 몸을 보여주어라. 사람들이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행동은 누군가 병을 고친다라고 했던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아만 가면 또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인 거죠. 당연히 제사장들한테 부지런히 가는 것 외에는 그 사람들 눈에 보일 리가 없었겠죠.


그런데 가는 길에 몸이 나았다라는 것이고, 그죠? 그리고 나은 것을 본 그 사람이, 모두가 나았는데 본 한 사람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그것 역시도 무언가에, 그냥 상식적인 것 뛰어넘어서 ‘아 되돌아가서 이 사람한테 감사를 해야겠구나’라는 것을 깨우친 그 한 사람이 가진 굉장한 독특한 사건인 것이죠.


저는 신앙인이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워낙 너무 비상식적인 것이 상식적인 것처럼, 그리고 비상식적인 종교 행위 자체가 그냥 상식적인 일반적인 종교의 행위인 것처럼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 전체가 지금 뭐 몰락해 가고 있는 그런 상황이지만, 바로 그 한 가지를 더 할 수 있는 눈을 감고 귀를 갖고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실은 예수의 복음을 정말 정확히 따르고자 노력하는 그러한 그 어느 한 사람, 그리고 이 시대는 바로 그 어느 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단지 숫자적으로 유일한 한 사람이라기보다 개별 개별 개별,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하는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지난 주간에 조금 더 계실 줄 알았는데 떠나보내야 했던 바로 그분, 어린이들에게도 여러 가지 사진으로,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나뉘었습니다만. 이거는 아까 이제 그 나병 환자들의 이제 그림이고요. 요거를 우리가 보지 못하고 넘어갔군요. 예, 그냥 넘겨주시면 됩니다.


저는 뭐 여러 가지 활동도 하시고 소탈하시고 존경받을 만한 조건이 굉장히 많으시죠. 그러나 저는 이분 역시도 일단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상식적인, 너무 비상식적인 목회자들이 많은 것 가운데에서 원칙을 아시고, 그리고 목회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확하게 아셨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아까 얘기했던 상식을 뛰어넘는, 넘을 수 있는 그 귀와 마음과 눈을 가지셨던 분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것은 저는 이분이 가졌던 원칙적인, 아주 보수적인, 그러나 굉장히 건강한 참 보수의 신앙에서부터 시작했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벽한 사람이 없으니까 긴 세월 동안 어떤 사람은 또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이분이 지나오셨던 운동의 내용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고 뭐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저는 목회자로서, 한 신앙인 그리고 한 목회자로서 이분의 삶을 되돌아볼 때에 아 이분은 참으로 값진 분이었고, 같이 호흡을 했던, 아니면 멀리서나마 그를 바라보았던, 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알던, 한 시대를 우리가 같이 살 수 있었다라는 것 굉장히 감사드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산을, 그 이웃 교회에서도 이 전별금 가지고 18억이니 20억이니 이런 얘기들이 있을 때 전별금이라는 거 없었죠. 도리어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교우들이 한 푼 두 푼 모았었던 게 전체 갖고 계신 것이었고, 그리고 이분이 대부분의 사례비를 듬뿍듬뿍 여러 사회단체에 노나 주어서 사셨다라는 것도 굉장히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기 쉽지 않은 시대에 그런 분을 스승으로, 그리고 선배 목사님으로 기억할 수 있음 참 감사드립니다.


이런 삶을 우리가 한번 되돌아보면서 다시 열왕기하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다음 그림에서는 예언자나 또 감사드렸던 사람, 감사드리지 않았던 사람, 여러 이야기 가운데에서 또 한 사람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그림인 것 같습니까? 네, 그 열왕기, 열왕기에 나온 그 마지막 부분에,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나온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아까 이제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엘리사가 그 나아만이 주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보냈을 때, 저걸 왜 다시 저렇게 그냥 되돌려 보내나 하고 생각했었던 한 분이 계셨죠? 그 위에 이름이 게하시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그 게하시는 다 달라 그럴 순 없으니까 예 은닢하고 뭐 이렇게 한두 가지 좀 주시면, 이거 우리 주인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해서, 결국은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냐 하면 나아만이 나은 그 병이 너에게로 간다고 해서 이 게하시가 다시 앓게 되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죠.


아까 얘기했었던 그 연장선 속에서, 저는 게하시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을까 이렇게 바라보기보다는, 저는 게하시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를 성찰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늘 마음 가운데에 무언가 아쉬운 부분, 채우고 싶은 부분, 다 가져올 것도 아니면서 아주 그 작은 떡고물 몇 가지 좀 챙겨볼까, 챙겨야 하지 않을까, 누가 이러면 이 정도 가지고 욕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 주는, 성찰해야만 하는 오늘 한 주간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갖고자 큰 것을 잃은 점은 없는지, 버려야 될 것들을 과감히 그냥 내려놓지 못하고 끄나풀을 잡고 질질질질 지금껏 끌고 오고 있는 것은 없는지. 그래서 사실 게하시 신드롬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사실은 내가 한 번쯤 이런다고,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하는 것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전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여러분들 뭐 굳이 말로 안 해도 아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을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가. 저는 오늘 하늘뜻의 마무리를, 다시 한 번 홍 목사님께서 이천년을 여시면서 신학생들에게 하셨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다시 나누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서울신대에 가셔서 학생들, 특히 새내기들에게 하셨던 강연 원고라고 전해져 있습니다만, 신학생이라고 그래서, 신앙인 저희,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는 이야기고, 13년이 지난 이후에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 시대가 요구하느냐, 필요로 하느냐. 첫 번째는 비판적인 지성인을 요구한다고 했고, 그다음 두 번째는 행동하는 양심이 요구된다라고 하셨고, 그리고 셋째로 넓은 시야를 가진 이들이 필요하다라고 하셨고, 네 번째는 남을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혁명적인 그런 인간이 필요로 한 시대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뭐 비판적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불평, 트집, 비난 이런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물이나 사례를 분석하고 냉철하게 보고,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할 때는 반드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어떤 것을 옳다는 것 인정하고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여기에 더불어 여성 신학에서도 항상 의심하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홍 박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 교훈 등을 의심해야 한다. 어떤 사실, 명제, 진리, 종교적 교리, 신앙, 모든 것을 의심하라. 거기에서 여러분 자신의 의견을 도출하고 신념을 발전시키고 세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동하는 양심, 여기에도 이런 말씀 하십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죠? 우리가 안전한가? 괜찮은가?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가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그래서 양심에 따라 정의를 위하여 행동하고 일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고, 이런 사람들은 박해와 탄압을 받기 마련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넓은 시야라는 것은 개인주의에 매몰되지 말라는 이야기이고요. 남을 위한 인간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인간이기를 그친 존재로서의 불행한 그런 인간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사십시오라는 것이 이 부분하고 잇닿는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 혁명적인 인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면서 또 여러 가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안주하기를 거부하고"라는 말,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인간" 여기에 뭐라고 정의를 내리셨냐면 "옛날에 좋은 시절을 돌아다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없고 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래 지향적인 인간, 여기에는 아무리 과거와 현재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찬란함에 이해할 수 없다"라고 설명해 놓으십니다. 미래 지향적인 인간이 그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는 미래가 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나아만이 발가 벗을 수밖에 없었던, 벗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 왜 우리는 어느 순간 갔다가 되돌아와야 할 지점에서 되돌아오지 못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하시가 가지고 있었던 그 작은 욕심들, 우리에게는 무엇을 돌아보아야 하는지, 이런 말씀들을 새기면서, 우리에게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새롭게 거듭나야 될 어떤 인간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면서 우리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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