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라목사의 삶
임보라목사의 삶
초록나무 임보라 목사의
극진한 사랑, 아름다운 삶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 사도행전 18:9 -
초록나무 임보라 목사의
극진한 사랑, 아름다운 삶
- 사도행전 18:9 -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임보라는 종교적 색채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병이 있던 어머니를 따라 다섯 살, 여섯 살 무렵부터 가톨릭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신은 그닥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성당에 나가길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다 6학년 때 친구를 따라 성경학교에 다니며 교회를 찾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단짝 친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성서 통독 수련회에 참여해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도 경험하는 등 신앙이 한층 더 깊고 뜨거워졌습니다.
인생의 Color, ‘보라’
청년 임보라는 1987년 한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식 날, 자신의 이름과 같은 ‘보라색’ 휘장이 걸려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는데, 그때 학장이 “보라색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오랫동안 마음에 새겼습니다. 대학 시절, 임보라는 신앙과 운동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사회적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모교회(예장 통합) 청년부 담당 목사의 격려에 힘입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진보적 학풍의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후보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향린 공동체와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의 대표적 진보교회 중 하나인 향린교회는 임보라 목사가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실천한 소중한 공동체였습니다. 신학생 시절 강남향린교회에서의 전도사 사역을 시작한 그는, 이후 향린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고, 2013년에는 섬돌향린교회를 분립 개척해 담임목사로 섬겼습니다. 임보라 목사와 교우들은 ‘섬돌향린교회’라는 이름처럼 ‘향기로운 이웃이 딛고 오르내리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갔고, 처음부터 퀴어와 여성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환대받고 환대하는 ‘무지개교회’를 가꾸어 왔습니다. 또한 임보라 목사는 소속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성평등한 교단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서울노회, 전국여교역자회 교육위원회, 성폭력 대책위 등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성소수자의 목사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다른’ 존재가 아닌 ‘틀린’ 존재, ‘잘못된’ 존재로 차별받고 혐오당하는 성소수자를 보며, 임보라 목사는 “예수가 발가벗겨져 모욕당하고 있는” 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가 몸을 다시 입고 나타난다면 벗이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목 놓아 눈물 흘리고 있었을 그곳을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7년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되었을 때부터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헌신하면서,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 ‘무지개예수’, ‘퀴어신학아카데미’,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등에서 활동했고, 『퀴어성서주석』 발간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경계를 넘어 인권·시민단체와 연대하면서 ‘성소수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 사회적 심방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밥 한 끼 같이 먹고 음료수 마시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밥 먹고 물 마시는데, 누군가는 뙤약볕에 있어야 한다면 심방하듯이 갑니다. 목사들이 현장을 전부 감당하지 못한다면 잠깐 가서 힘이라도 보태는 게 신앙의 실천이기도 해요. 얻어맞은 사람,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임보라 목사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현장,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 현장 등, 고통과 저항이 있는 곳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도 임보라 목사의 목회 현장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구럼비와의 사랑
“맨발로 걸어도 생채기 나지 않는, 이게 정말 바위인가 싶을 정도로 푹신함마저 느껴지는 신비한 구럼비는 영물이었다. 그래서 구럼비를 한번 만나고 나면 구럼비의 신이 지펴 저마다 앓게 된다. [...] 그렇게 구럼비의 신이 지핀 이후, ‘구럼비는 살아있어요.’라는 말을 자주했다.” 임보라 목사의 사랑은 ‘종(種)’의 경계도 넘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한 시민 불복종 행동 중에 만난 구럼비를 연인처럼 끌어안았고, 이 일로 벌금형을 받자 항의의 뜻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자진 노역을 선택했습니다. 임보라 목사의 ‘보랏빛’ 평화에는 ‘초록빛’ 생명이 함께했습니다.
사랑한 이유로 ‘이단자’가 되다
2017년, 한국 기독교 8개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임보라 목사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가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퀴어신학을 설파한다는 이유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을 인정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임보라 목사는 다른 교단의 결정에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자기의 신앙을 형성했던 모교단 예장 통합의 결정에는 “큰 타격을 받았다.”며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사회와 교회에서 차별받고 혐오 당하고 배제되는 소수자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임보라 목사는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극진한 사랑, 아름다운 삶
2023년 2월 3일, 임보라 목사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너무 이른, 그래서 임보라 목사가 사랑했고 임보라 목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아프고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임보라 목사는, “입으로 외치는 100명 대신 몸으로 싸웠던 단 한 명”이라는 어느 부고 기사 제목처럼, 다른 사람들의 열 배 백 배의 밀도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총량 중 마지막 ‘1그램’까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게 나눠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임보라 목사의 사랑은 극진했고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임보라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임보라는 종교적 색채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병이 있던 어머니를 따라 다섯 살, 여섯 살 무렵부터 가톨릭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신은 그닥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성당에 나가길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다 6학년 때 친구를 따라 성경학교에 다니며 교회를 찾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단짝 친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성서 통독 수련회에 참여해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도 경험하는 등 신앙이 한층 더 깊고 뜨거워졌습니다.
인생의 Color, ‘보라’
청년 임보라는 1987년 한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식 날, 자신의 이름과 같은 ‘보라색’ 휘장이 걸려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는데, 그때 학장이 “보라색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오랫동안 마음에 새겼습니다. 대학 시절, 임보라는 신앙과 운동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사회적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모교회(예장 통합) 청년부 담당 목사의 격려에 힘입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진보적 학풍의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후보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향린 공동체와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의 대표적 진보교회 중 하나인 향린교회는 임보라 목사가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실천한 소중한 공동체였습니다. 신학생 시절 강남향린교회에서의 전도사 사역을 시작한 그는, 이후 향린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고, 2013년에는 섬돌향린교회를 분립 개척해 담임목사로 섬겼습니다. 임보라 목사와 교우들은 ‘섬돌향린교회’라는 이름처럼 ‘향기로운 이웃이 딛고 오르내리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갔고, 처음부터 퀴어와 여성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환대받고 환대하는 ‘무지개교회’를 가꾸어 왔습니다. 또한 임보라 목사는 소속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성평등한 교단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서울노회, 전국여교역자회 교육위원회, 성폭력 대책위 등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성소수자의 목사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다른’ 존재가 아닌 ‘틀린’ 존재, ‘잘못된’ 존재로 차별받고 혐오당하는 성소수자를 보며, 임보라 목사는 “예수가 발가벗겨져 모욕당하고 있는” 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가 몸을 다시 입고 나타난다면 벗이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목 놓아 눈물 흘리고 있었을 그곳을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7년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되었을 때부터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헌신하면서,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 ‘무지개예수’, ‘퀴어신학아카데미’,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등에서 활동했고, 『퀴어성서주석』 발간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경계를 넘어 인권·시민단체와 연대하면서 ‘성소수자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 사회적 심방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밥 한 끼 같이 먹고 음료수 마시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밥 먹고 물 마시는데, 누군가는 뙤약볕에 있어야 한다면 심방하듯이 갑니다. 목사들이 현장을 전부 감당하지 못한다면 잠깐 가서 힘이라도 보태는 게 신앙의 실천이기도 해요. 얻어맞은 사람,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임보라 목사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현장,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 현장 등, 고통과 저항이 있는 곳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도 임보라 목사의 목회 현장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구럼비와의 사랑
“맨발로 걸어도 생채기 나지 않는, 이게 정말 바위인가 싶을 정도로 푹신함마저 느껴지는 신비한 구럼비는 영물이었다. 그래서 구럼비를 한번 만나고 나면 구럼비의 신이 지펴 저마다 앓게 된다. [...] 그렇게 구럼비의 신이 지핀 이후, ‘구럼비는 살아있어요.’라는 말을 자주했다.” 임보라 목사의 사랑은 ‘종(種)’의 경계도 넘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한 시민 불복종 행동 중에 만난 구럼비를 연인처럼 끌어안았고, 이 일로 벌금형을 받자 항의의 뜻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자진 노역을 선택했습니다. 임보라 목사의 ‘보랏빛’ 평화에는 ‘초록빛’ 생명이 함께했습니다.
사랑한 이유로 ‘이단자’가 되다
2017년, 한국 기독교 8개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임보라 목사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가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퀴어신학을 설파한다는 이유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을 인정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임보라 목사는 다른 교단의 결정에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자기의 신앙을 형성했던 모교단 예장 통합의 결정에는 “큰 타격을 받았다.”며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사회와 교회에서 차별받고 혐오 당하고 배제되는 소수자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임보라 목사는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극진한 사랑, 아름다운 삶
2023년 2월 3일, 임보라 목사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너무 이른, 그래서 임보라 목사가 사랑했고 임보라 목사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아프고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임보라 목사는, “입으로 외치는 100명 대신 몸으로 싸웠던 단 한 명”이라는 어느 부고 기사 제목처럼, 다른 사람들의 열 배 백 배의 밀도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총량 중 마지막 ‘1그램’까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게 나눠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임보라 목사의 사랑은 극진했고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임보라 목사님, 고맙습니다.
※ 임보라 목사 활동사진은 박김형준 님, 최우영 님이 기증해주셨습니다.